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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언젠가부터 익숙해진 몇 가지가 있다.

 

리즈님을 만나는 시간과

리즈님의 쿠사리와

다른 곳만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그의 냉정함까지…….

 

하지만 그런 것은 현관에 놓인 화분처럼

그와 나의 경계선에 놓여있는 것 이겠거니했다.

언젠가는 나를 바라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까지 당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눈빛을 읽고

그의 말투와 손짓을 닮아가는 '나'를 본다

길들여지고 있는 것인가.

 

길들여진다는 것이 슬퍼진다는 것과 같은 것인지를

이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나) 하이 리즈님?”

 

“(리즈님) 요즘은 맨날 늦는구나.”

 

“(나) 미안해 리즈님! 먹고 사는 것이 쉽지 않다 보니.”

 

“(리즈님) 맨날 이렇게 시간 약속도 못 지켜서 뭐 제대로 할 수 있는 거나 있겠누! 어디 가서 실수만 연발하고 다니는 것은 아니누?”

 

“(나) 흠, 많이 애쓰고 있구먼 ㅡㅡ^! 내가 리즈님한테 하는 것이 그것 밖에 안 된다는 거야? 오늘도 시간 맞추느라 무진장 달려왔단 말이야. 너무해. -_-ㆀ”

 

“(리즈님) 하하, 쪼잔하긴. 뭘 그 정도 가지고 풀이 죽누, 하루 이틀도 아니면서. 어서 나서자꾸나. 여기 기다리는 숙녀분이 안보이누?”

 

아, 지금까지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어쩐지 맨날 팅팅거리던 리즈님의 말투가 약간은 누그러지게 들리고.

그녀는 그렇게 다정하게 리즈님의 옆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누구지? 대체 누구야!!!'

 

밉게 뜯어 보려고 해도 그녀의 고운 모습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은은한 빛이 감도는 단아한 옷차림에 여전히 맑은 웃음을 머금은 채 서 있었다.

헐, 이런 구질구질한 모습까지 보이다니.

 

뭐 그래도 이 정도로 좌절할 나는 아니지.

지금부터 만회의 기회를 찾는 거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

 

열흘 붉은 꽃은 없으며, 십 년 가는 권세가 없다 하였으니, 그녀의 아름다움 또한 시들어질 것이오, 우아틱한 그녀의 자태도 언젠가는 풀어질지니…….

 

별 놈의 말을 다 가져다가 위로를 해 본다.

 

그렇지만 이렇게 스스로를 추스려 보려는 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즈님은 그녀를 따라 네크로폴리스로 떠났다.

 

“(나) 리즈님 같이가~”

 

사냥터 소개와 인도는 언제나 나의 몫이었는데, 이쁜 그녀는 아는 것도 많았다.

이쯤 되니 나의 고운 심성도 조금씩 오염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도대체 그녀의 빠지는 점이 무엇일까?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아무튼 달려, 달려 도착한 그곳은 칙칙함과 음산함이 두 배로 뿜어져 나오는 처형터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두려움도 없는지. 이런 험한 곳을 들락거리다니 분명 비.릿.한.과.거.가 있었을 거야!

 

“(나) 저기, 실렌…….”

 

“(실렌) 네?”

 

“(나) 어떻게 이런 곳을 다 알아, 자주 오는 곳이야?”

 

“(실렌) 하하, 네 자주 와요. 이번 새로운 사냥터에 대한 포고가 있은 후로는 친구들과 이 곳에 자주 왔어요. 저 같은 엘프 위저드에게는 마공을 연마하는데 이 만큼 좋은 곳이 없답니다. 아마 리즈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하하하.”

 

'리즈님이 좋아하실 거라닛!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리즈님은 내가 더 잘 아는 걸!

아니... 내가 안지 더 오래 됐지.

아니... 아마 내가 더 알거라 생각해, 글쎄 내가 알고 있는 건 뭘까...


어쩜 저렇게 웃을 수가 있지?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자주 온다는 말을 하지 않나, 그리고 그녀의 모습과 영판 따르게 삭막한 곳인데다가 별로 분위기도 좋지 않구먼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그녀는 바로 대답을 한다. 그렇게 자신이 있나?

 

아, 이렇게 삐뚤어지게 바라보려고 하면 안 되는데, 이래야 할 필요가 없을 텐데. 난 뭐 때문에 이리도 초조해 하고, 더욱 꼬여가는 걸까. 그녀는 너무나도 정확하게 자신을 이야기하고 드러내고 있었다.

 

비릿한 과거인가 뭔가를 파 보겠다는 마음도 저만치 멀어졌다.

꼬이지 말자 그냥 있는 것을 그대로 봐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지구 라트 게이트 키퍼를 통해 들어선 네크로폴리스의 내부는 음산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다. 항상 맑은 햇살과 콧등을 간질이는 바람을 맞으며 사냥했던 터라 지하 물길 터널을 지나 있는 이 곳의 습한 기운은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몹들의 흉찍함 또한 상상 이상이었고, 그 손아귀의 강인한 한방도 기분을 더럽게 하는 데에는 충분한 도구가 되었다. 이 넘들은 필드에 있는 넘 들 보다는 훨씬 더 강하고, 사악한 주문까지 걸어왔지만 꾸준히 수련하며 준비해 온 리즈님은 비교적 잘 극복해 나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함께 있어서일까, 가능하지 않을 거라 생각되던 것들을 하나씩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혼자 보다는 둘이 낫지. 그래, 나을 거야. 내가 해 줄 수 없는 것들을 그녀는 아주 쉽게 해가고 있었다.

 

리즈님과 그녀는 서로의 마공을 뽐내기라도 하는 듯, 한 번씩 번갈아 가며 몹들을 데리고 놀고 있었다. 필드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달려 다니던 리즈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부정할 수 없는 건, 그녀가 이 던전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던전이 밝아졌다는 거다.

 

그리고 리.즈.님.마.저.도.

 

‘그녀는 뭔가 신비로운 힘을 가진 것이 분명해.’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는 게 편할지도 모르겠다 싶은 마음의 반영인지도.

특별한 넘이라 비교를 거부하려는.

 

기타와 만도린을 연주하여 대화를 하듯 리즈님의 불의 기운을 담은 공격과 실렌의 바람의 기운을 빌은 마공은 뽕짝뽕짝 즐거우면서 무서운 하모니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가냘프게 생긴 두 사람이 실제로 하고 있는 건 무시무시한 작업이었다.

 

“(실렌) 휴 ~ 리즈님, 우리 좀 쉬어요.”

 

“(리즈님) 하, 정말 정신 없는 곳이구나. 실렌 넌 정말 빠르기도 하구나. 사뿐사뿐 마치 나는 것 같이 ^^”

 

“하하하, 호호호, 하하하, 호호호.”

 

굳 뉴스 하나 배드 뉴스 하나.

 

'간만에 쉬는 시간이 정말 재미있구나.' 이게 아마 좋은 소식이겠지.

 

그리고, 나머지는 '이 재미있는 대화에 내가 낄 틈이 조금도 없다'는 거다.

 

아, 나도 덥고 열난다. 나름대로 바빴구먼.

시원한 맥주라도 마시고 나만의 여유를 즐기던지 해야지.

 

'큭, 이 귀족 넘, 맥주 먹고 다시 한번 깽판을 부려봐?'

 

그러면 실렌이 도망갈 지도 모르겠군.

 

생각만 해도 재미있지만 이건 마지막 카드로 써먹어야지. 갑자기 마음에 비단 같은 여유로움의 강물이 흘러가는 건 왜일까. 일단은 함께 즐겨보자구. 우린 아직 아는 것 보다 알아야 할 게 더 많으니까 말야. ^_*

 

내일은 붉은 태양이 뜰지 푸른 태양이 뜰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이 새로운 아침을 알려주는 신호가 될 거라 믿으며 리즈님과 나는 또 달려간다. 

 

Written by 헬리우스 알하나 2006.02.0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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