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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나를 두고 혼자 술을 마셨다.

 

의외의 모습이었다. 뭔가 많이 힘든 일이 있는가 보다.

한잔, 두잔 마시던 술은 그녀의 의지를 쉽게 끊어 놓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난 이름도 모를 무시무시한 몬스터에게 맞아 마을을 들락거려야 했다.

 

무엇이 그녀는 이렇게 만들었을까?

평소 보던 그녀의 깍듯함과는 좀 다른,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말 속에서

그녀가 뭔.가. 때문에 힘들어 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뭔.가.속.에.는.나.도.포.함.되.어.있.었.다.

 

“야, 이 나쁜 귀족 넘, 왜 이렇게 내 맘을 몰라주냐...”

 

난 귀족 넘이 아니다.

그녀는 번지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그리고 그녀가 잘못 알고 있는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난 사실 그녀를 무시하지도 관심 없어하지도 않았다는 거다.

 

그녀는 내가 알던 아덴 월드의 여자들과는 달랐다.

헐벗고 다니면서 좀 봐주라고 치대는 것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지.

 

따뜻함이 있으면서 경쾌함이 묻어나는,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고 뭔가를 모른다고 해서 기세가 꺾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난 그녀의 이런 솔직함과 자신감이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만.날.생.각.으.로.하.루.를.보.냈.다.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모른척 하며 딴 곳을 바라보는 척 했다는 것을 그녀는 모른다. 그녀의 눈빛을 받는 것 만으로도 조금씩 행복해졌다. 나 같은 놈을 그토록 생각해 주다니.

 

전직을 하여 위저드란 직업을 갖고 나도 뭔가 그녀를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다.

예전처럼 할 일 없는 놈팽이로 돌아간다면 그녀는 나를 돌아보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녀를 잃을까 오히려 두려워진다.

 

그래서 스스로의 길을 찾아보려고 노력도 했다.

사냥터도 찾아보고, 무엇을 해야 할 지 닿는 모든 선을 통해 정보를 얻어보려고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사냥터에서 주운 이.상.한.돌.맹.이.하.나.

그녀는 이걸 가지고 많은 고민을 했다.

잘 해 주는 것 하나도 없는 나 같은 놈 하나 때문에 아덴 월드에 올 생각을 하다니.

 

알고 있었다. 내 머리칼을 가지고 간 거.

무녀 따위의 주문이 걸린 돌맹이를 가지고 그토록 힘겨워할 줄은 몰랐다.

 

현실의 세상, 아름다운 곳이다.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덴에서의 삶이란,

아름다워 보이는 풍경 뒤에는 죽거나 죽이거나의 한 가지 만이 있는 곳이다.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그건 단지 운이 좋아서 일 뿐이다.

 

죽기 아니면 죽여야 하는 삶이 있는 곳, 잘 나가지도 못하는 나 같은 놈팽이는 그녀 한 사람도 보호할 수 없다.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질수록 나라는 놈에 대한 한숨만이 늘어간다. 좀 잘 살아 놓을 걸.

 

그랬다면

찰나의 시간만이라도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 아덴에서 함께 지낼 수도 있을 텐데.

 

그녀가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은 너무도 다르다.

어쩌면 우린 애초부터 만나지 말아야 할 사이었는지도... 제길슨.

 

그녀가 힘들어한다.

그녀는 일상에 찌들어 파 김치가 된 채 나를 찾아왔다.

 

'나의 어린양. 지금 힘들구나... 내 앞에서는 힘들어해도 돼...'

 

이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작아진 어깨를 보듬으려 해도 할 수가 없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막...

 

이렇게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그녀의 손을 잡아 끌지 못하는 내 자신이 짜증 난다. 제길슨.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녀의 기대에 맞춰 멋진 위저드가 되는 것뿐인가?

 

난 그녀 앞에 멋진 모습으로 설 수만 있다면 피를 깎는 고통이라도 그대로 감수하기로 했다.

피를 깍아 마법을 연마했다. 덕분에 눕기도 많이 누웠다.

 

아덴 월드에 있는 놈들은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냐며 비웃었다.

그녀의 애처로운 눈길을 보냈지만 그녀 앞에서만은 멋진 모습으로 서고 싶었다.

 

내가 한번 누울 때 마다 그녀는 나 보다 더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녀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는데.

나름대로 많은 기술을 익히고 연구했지만 그녀의 ‘님’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보잘것 없는 '놈'이라면 모를까.

 

그녀는 매일 한 걸음 씩 아덴 월드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 속에 있는 돌을 놓지 않았다. 그녀가 뭔가 결심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도 그녀가 설 자리는 아덴 월드가 아니라는 생각만이 맴돈다.

 

그녀 하나도 책임질 수 없는 내 자신이 초라해 보인다.

젠.장.기.분.더.럽.다.

 

'나 같은 놈은 잊게 해야 한다.'

 

엘프 여인네를 하나 꼬셨다.

그녀의 눈을 가리기에 딱 좋은 거리이다.

쭉 빠진 팔등신 몸매에 사뿐한 걸음 걸이, 맑은 목소리, 게다가 여.러.면.에.서.착.하.다.

 

그녀는 나의 새로운 친구를 보고 서운해 하는 것 같았다.

많이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그녀를 보니 마음만 더 아프다.

그녀를 슬프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철없는 그녀는 나의 새 연인에게까지 잘 해준다. 니.는.속.도.없.나!

이래서 내가 그녀를 잡을 수가 없다.

그녀를 진짜 눈물 나게 해서는 안될 것 같다.

그녀가 속한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루 아침의 이슬 같이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아덴 월드에 오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그.녀.를.위.해.할.수.있.는.단.한.가.지.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그녀를 밀어 냈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져간다.

그래도 어느 날 그녀가 내 앞에서 사라져 버릴까 두렵다. 제길슨.

 

한 팔에 어여쁜 여인네를 품고 있건만 왜 기쁘지가 않은 거냐!

상상도 못한 일이다. 바라던 일이건만 모든 것이 귀찮다.

한 발짝 나서기도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도 않다.

 

아덴 놈들은 하루 종일 레벨도 한참 낮은 아래 것 같은 것들의 버프나 하고 따라다녀야 하는 삶도 많은데, 받들어 뫼심을 당하면서도 즐기지 못하냐며 복에 겨운 놈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비아냥 거린다.

 

게다가 현실의 놈들에게 개팔리듯 팔려다니는 인생도 많건만

휴지쪽 같은 만남에 연연하냐며 정신차리라고 충고하는 놈도 있다.

 

휴.지.쪽.같.은.만.남.이.아.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그녀가 왔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 말을 듣고나면 거역하기 어려울 것만 같았다.

 

그녀의 세상을 버리고 아덴 월드로 들어오려하고 있다.

내가 대답을 하는 순간 그녀의 현실은 사라질 것이다.

아덴 월드, 현실의 인간이 들어올 수는 있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나를 택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될 그녀, 그녀를 아덴 월드로 빨아들여선 안 된다.

 

가.슴.이.아.프.다.

 

가슴 속에서 울컥 쏫아오르는 것들을 누르고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가야할 곳이 있다며 자리를 피해 나왔다.

엘프 여인네의 허리를 잡아 채고 야릇한 웃음까지 날리며...

 

알고 있다... 그녀의 눈에 이슬이 맺힌 것을.

다시는 그녀를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나에게 처음으로 아픔을 느끼게 한 그녀, 나의 어린양, 이젠 안녕.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그녀와 같은 세상에 태어날거다.

 

광활한 아덴 월드 건, 그녀가 항상 지친 얼굴로 달려오는 저 넘어 현실 세계 건

 

그녀와 함께 나서 그녀를 지켜줄 거다.

 

이렇게 그녀를 보내지는 않을 거다.

 

아덴의 시린 바람이 가슴을 도려내듯 흩고 지나간다.

 

담배를 한 모금 빨아보지만 씁쓸하다.

 

촌스럽게 눈물은 왜 나는 거야, 제길슨.

 

기분 더럽다.

 

Written by 헬리우스 알하나 2006.02.1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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